선인수맥감정연구회 수맥정보
조봉암(曺奉岩.1898 ~ 1959)의 본관은 창녕(昌寧)이다. 호는 죽산(竹山)이며 경기도 강화 출생이다. 이승만 대통령의 최대 정적이었던 그는 자유당 정권 당시 정치적 박해의 표상으로 꼽힌다.
죽암은 제헌 국회의원, 초대 농림부장관, 2대 국회의원, 국회부의장까지 탄탄대로였다. 그러나 1952년 제2대 대통령 후보로 출마해 차점으로 낙선하면서 비운의 길을 걷기 시작한다. 그의 놀라운 득표는 이승만 장기집권의 큰 장애물로 떠올랐다. 이승만의 최대 정적으로 부상한 것이다.
조봉암은 1956년 3대 대통령 선거에서 신익희가 급서하는 바람에 뜻하지 않게 사실상 야권 단일 후보가 되는 운명을 맞았다. 투표 결과는 이승만 504만여 표, 조봉암 216만여 표였다. 절반도 안 되는 득표였지만 조봉암의 부상은 장기독재를 획책하던 이승만의 간담을 서늘케 했다.
죽산은 1956년 11월 진보당을 창당, 위원장이 되어 정당 활동을 했다. 그러나 자유당 정권은 1958년 1월 조봉암, 양명산, 서상일 등 주요 진보당 간부들을 간첩혐의로 구속했다. 법원의 1심 판결 결과 조봉암, 양명산만 징역 5년이 선포된다.
그러자 전국에서 자유당의 사주를 받은 땃벌떼, 백골단 등의 반공청년들이 연일 시위를 벌였다. 결국 조봉암은 2심에서 사형선고를 받고 1959년 7월 29일 형장의 이슬로 사라졌다. 당시 국내 언론들은 물론 외국 언론들도 일제히 이승만 정권을 규탄했다. 이날을 '헌정사상 최고 암흑의 날'이라고 부르는 사람들도 있었다.
죽산은 "정치적으로 조작된 사건이니 사형 아니면 무죄를 달라"고 당당하게 최후진술을 했다. "나에게 죄가 있다면 정치활동을 했다는 것밖에 없다. 마지막으로 술이나 한잔 주시오." 그러나 그 마지막 청도 거부된 채 서대문 교도소에서 교수형이 집행된다. 독재자의 입장에서는 최악의 선택을 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죽산 조봉암 선생 묘는 서울 중랑구 망우산 사색의 길 동락천 약수터 근처에 있다. 이 비석 뒤는 비문이 없다. 죽산이 1959년 진보당사건으로 사형된 후 창녕조씨 문중에서 지금까지 비문 제작을 거부했기 때문이다.
진보당 사건과 함께 빠질 수 없는 이름은 당시 담당판사였던 유병진이다. 유병진은 1958년 7월 2일 1심 간첩죄와 국가보안법 위반죄로 기소된 조봉암에게 국가보안법 위반만을 인정, 징역 5년을 선고했다. 나머지 진보당 관계자 전원에게는 무죄를 내렸다. 이승만 정권은 깡패들을 동원,‘타도 유병진’을 외치게 했고, 결국 그는 1958년 말 판사직을 떠나야 했다.
진보당 사건은 이승만 정권의 반인권적인 정치탄압이라는 진실화해위원회의 결론이 지난 2007년에 나왔다. 위원회는 국가가 사과해야 할 일이라고 권고했다. 증거도 없이 제3자의 허위자백만으로 조봉암에게 간첩죄와 국가변란죄를 뒤집어 씌웠다는 것이다. 위원회는 "북한 공작금을 조봉암에게 전달했다"고 주장한 인물은 한 달 동안 불법 감금조사를 받아 위법성이 확인됐다고 밝혔다.
위원회는 국가가 고인의 명예회복을 위해 재심을 진행하고 유족에게 사과하는 등 적절한 조치를 취해야 한다고 권고했다. 진실화해위원회는 또 일제 강점기 당시 독립운동을 하다 복역한 사실을 근거로 조봉암 선생을 독립유공자로 인정하라고 덧붙였다.
조봉암 선생의 딸 조호정씨는 "명명백백히 다 밝혀져야지. 우리 가족도 좋고 돌아가신 분도 눈을 감으실 거 아니에요. 그 얼마나 원통한 일이에요."라고 말한다. 사법살인으로 불렸던 진보당 사건은 다시 법정에서 진상을 가릴 수 있게 될 지 주목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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