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 전국출장 수맥과터 진단전문/ 주택(APT.전원주택) 산소,사무실 감정 010 6277 1193
  • 전국출장 수맥과터 진단전문 / 주택(APT.전원주택) 산소,사무실 감정 010 6277 1193
◀ 수맥의 모든것 ▶/§ 수맥정보 2580

선인수맥감정연구회 수맥2580-누가 風水說(풍수설)을 미신이라 했는가?(풍수실화 & 설화

by 宣人 2011. 2. 8.

선인수맥감정연구회 수맥2580

누가 風水說(풍수설)을 미신이라 했는가? 

고 임응승(세레명 요한) 신부 소개.

고 임응승 신부는 1923년10월 5일 황해도 은율군 이도면 
고정리에서 출생하여 카톨릭대학 본과, 
카톨릭대학 연구과를 졸업 후 1950년 4월15일 사제서품을 받고 같은 해 
6.25 전쟁이 발발하여 남한으로 탈출하여 천주교 안성교회 보좌신부로 
출발해 일평생 복음을 전하는 한편, 

수맥에 통달하여 언론에서도 수 차레에 걸쳐 
“집터. 묘 자리 잘 잡아 名風으로 소문난 신부님”
이라고 보도하는 등 극찬을 아끼지 않았는데, 
그 중에서 은혜를 입고 보은의 편지를 쓴 
사례가 수없이 많지만 하나만 소개 한다.

※임 신부님은 수맥을 측정할 때 요즘 흔히 쓰는 엘로드를 사용하지 
않고 팬들륨(추)을 주로 사용했는데 사람들은 하도 신통하게 처방을 잘해
 신비의 추라는 별명을 붙여주었다.

글쓴이의 시기는 1985년경으로 추정되며 서론이 시작 된다.

내 자식의 죽음 그리고 평온, 사람이 죽고 삶은 하나님의 장중에 있다고 했다.
 적어도 내생의 철학은 인명재천이라는 데는 조금도 변함이 없다.

그러나 내 아들의 죽음을 지켜보며 참으로 슬픈 마음 금할 길 없어 나의 
아픈 경험이 타인들의 귀감이 되도록 화를 입지 않고 살아갈 수 있는 
예지가 되어 주었으면 하는 심정에서 이 글을 쓴다.

갑작스런 어머니의 타계

직장일로 해서 매일처럼 분주하게 뛰어야 하는 어느 날 갑자기 모친상을 당했다. 
생전에 자식의 출세만을 위하여 노심초사 하시던 어머니였기에 마지막 가시는 길, 
자식 된 도리와 효를 다 한다고 공원묘지 양지바른 곳에 정성껏 장례를 마쳤다. 
묘 터 또한 넓게 잡았고 비석도 대리석으로 세웠다. 

집사람과 아이들은 할머니의 묘소를 아름답게 꾸민다고 묘소 둘레에는 
꽃나무로 장식했다. 효를 다 받지 못하고 가신 어마니 생각을 하면 
쏟아지는 눈물 주체 할 수 없지만 천수를 다하고 가신분의 앞길을 자식인들 
어찌 막을 수가 있으랴! 울적한 마음이 가슴을 눌렀지만 나는 예술과 생활 
사이로 되돌아갈 수밖에 없었다.

묘 에는 이유 없이 잔디가 자라지 않았다.

장례를 치르고 나서 그 해 가을 가족들과 함께 모친 산소에 성묘를 갔다 
가서 보니 잔디가 볼품이 없었다. 바쁜 생활에 쫒기다 보니 성묘를 자주가지 
못해 잔디마저 고르게 기르지 못했구나 싶어 관리인을 불러 팁까지 두둑하게 
주며 死草를 특별히 부탁을 했다.

관리인이 허리를 깊이 꺾으며 “염려하지마세요”며 정중히 대답한다.
그런데 그 이듬해 봄 한식일이 되어 다시 성묘를 갔는데 여전히 살아나지 
못하고 시뻘건 객토가 민 대머리처럼 보기 흉하게 흘러내리고 있었다. 

나는 화가 치밀어 관리인을 불러 모질게 야단을 쳤다.
“도대체 당신 돈만 받고 관리도 해주지 않는 거요”
“……………………”
“당신들 이렇게 관리해서 누가 이 공원묘원을 찾으리라고 보시오 
당신들 양심에 털난 사람들이요” 
심한 욕설에 관리인도 머리를 긁으며 한마디 했다.

“그렇지 않아도 선생님 부탁받고 좋은 잔디를 야무지게 입혔는데 
웬일인지 떼가 살지를 않아요. 믿지 않으시겠지만 두 번이나 사초를 했습니다.” 
관리인이 밉살스러웠지만 붉은 객토가 튀어 나오는 묘소를 자식된 도리로 
어디 그냥 두고 볼 수야 있겠는가?

그날도 나는 관리인의 등을 두드리며 팁을 손에 
쥐어주고 돌아서며 한마디를 잊지 않았다. 
“부탁 합니다 이것이 자식들의 효심이 아닙니까?”

내 아이가 죽는다.

한식날인 그날의 하늘이 유난히 찌프듯 했다. 먹장구름이 낮게 드리워, 
을시년스럽기까지 한 그 기후 속에서 웬지 울적해지는 마음으로 귀로에 올랐다
 돌아오는 길에 우리 가족은 소낙비를 만났다.

아내가 승용차 안에서 한마디 했다.
“여보 당신 잘하는 소주나 한잔하고 들어가시지요?”
벽제로 오르는 한길 옆에 우리 가족은 차를 세웠다 그 곳은 갈비집 으로 유명했고, 
서울서도 식도락을 즐기는 이들의 발걸음이 떨어지지 않는 곳이기도 했다.

하얀 소주가 아내의 손으로 잔에 채워지고 성묘 시에 
느꼈던 외로움은 주기에 얼얼해져 쉽게 잊혀 질 수가 있었다.

웃고 떠들며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 
곁에 않아 고기를 뜯던 아들이 얼굴이 하얗게 변하여 골이 아프다고 한다.
“왜 그래? 어디 속이 좋지 않으냐?” 
애 어미는 수심이 가득하여 아들의 이마를 짚었다. 

아들의 얼굴엔 찬 기운이 돌았다.
그래도 자식놈은 어미의 마음을 안정시켜 주려는 듯 
창백한 얼굴에도 씩~하니 웃음을 뱉어냈다.

“괜찮겠지요 뭐”그러나 우리 식구는 먹던 음식상을 뒤로하고 
비 퍼붓는 서울로 질주해 돌아왔다. 
그날따라 세브란스 병원은 한가했다 응급실에 아이를 데리고 
들어가 진찰을 받게 하는 동안 불안한 마음이 초조하게만 느껴졌다. 
의사는 신경성이라고 하며 간단하게 처방을 하고 신경안정제를 
먹여서는 돌아가라고 한다.

그날 이후 아이는 핏기가 없었다. 생각다 못해 종합 진단을 받아 
보았는데 이를 어이하면 좋으랴! 백혈병 이라는 무서운 사형선고였다.

“내 아이가 죽는다 내 아이가 죽다니...”
오만 간장을 녹이는 슬픔이 오열을 삼키게 했다.
아이의 어미는 실신한 여자와 같았다. 

아비의 슬픔이 크다고 크게 소리하여 울 수도 없는 것이 어미의 
아픈 눈물 대문에 슬프다고 꺼이꺼이 울 감정도 허락되지 않았다.

부모의 사랑의 간병과 정성에도 불구하고 우리 아이가 
부모 곁을 떠난 것은 발병 이후 6개월 후였다.

삶을 체념하고 술로서 세월을 보냄.

아비를 닮아 머리가 영민하고 어미를 닮아 예쁘장하다는 내 아들은 
세상에 태어나 햇볕 한 번 보지 못하고 짧은 인생을 어린 나이로 타계했다. 
아이를 땅에 묻던 날 솔직히 말해 나의 생명은 의미를 잃었다. 

술이 나의 슬픔을 위로할 것 같아 일이 끝난 저녁이면 밤늦도록 
캬스트들과 푸념을 늘어놓으며 아픈 세월을 살게 했다.

나는 그때 비로소 당신의 아들을 세상의 죄인을 위하여 십자가에 
내어준 하느님의 사랑이 얼마나 크고 막중한 것인가를 터득하기 시작했다.
그래서 깊이 종교에 침잠되어 가고 있었다.

친구의 조언 

그러던 어느 날 동료에게서 신비의 추의 주인공 임응승 신부님의 소식을 들었다. 
“장례 치르고 3년 이내에 큰 화가 있다면 조상의 산소가 나쁘다는데 
임신부님을 찾아뵙고 한번 모친 산소를 모시고 가보지 그래” 
“자식 죽이고 무슨 희망이 더 있다고 번거롭게 산소를 찾겠냐!”

그러자 동료는 펄쩍 뛰었다 “이 사람아 남은 애들도 생각해야지”
왜 그런지 그 말이 날카로운 비수가 되어 가슴을 깊이 찔러왔다. 
그 동료와 헤어지고 난 후에도 그의 말은 오랫동안 내 마음을 사로잡았다

임 요한 신부를 만나다.

결국 며칠 후 나는 임신부님을 찾아 갔다. 
임신부님을 처음 뵙는 순간 시골 나의 고향에서 쉽게 
만날 수 있는  정겨운 촌로와 같은 친근한 인상 이였다.

“신부님 모친의 산소를 한번 보아 주시지요”
내 눈에서는 어느 샌가 눈물이 주르르 흘러내리고 있었다.
“…………………”
임신부님은 말없이 나의 손을 꼬옥 쥐어 주셨다. 
부친의 손처럼 따뜻했다. 

그 길로 신부님과 함께 모친의 산소로 달려갔다. 신부님은 흰머리가 
바람에 나부끼는데도 묘소로 오르는 산길을 힘드시다 하시지 않고 잘도 걸으셨다.

모친의 산소에 이르렀을 때였다. 음 쯧쯧 수맥위에 묘를 썼구먼”
“예?” 그 말에 영문을 몰라 큰 소리로 되물었다.
“떼가 잘 안 살았지요?”
“예.” “어디 봅시다.”

신부님은 예의 신비의 추를 주머니에서 꺼내 시드니 기도하는 자세로 정 자세를 하셨다. 
그때였다 신부님의 손에든 추가 좌우로 요란히 흔들렸다. 
“보세요! 이 추가 이렇게 요란한 것은 무덤 밑에 큰 수맥이 지나가고 있기 때문입니다 
수맥이 지나가면 자손들에게 큰 화가 미치는 법인데 일찍 저를 찾아오시지 않고요!”

나는 그만 정신이 나가 잔디위에 풀썩 주저 않고 말았다. 
물에 빠진 사람 지푸라기라도 잡는다는 격으로 신부님의 바지가랑이를
움켜잡으며 끙 신음을 뱉으며 소리쳤다.

“신부님 어떻게 하면 되겠습니까?” 신부님은 나의 등을 가만 가만 두들겼다. 
“이장을 하시면 됩니다. 그냥 두면 또 화가 미칩니다.”

또 화라면 곧 나의 죽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닌가? 
나는 경황이 없었다. 신부님을 졸라 그날로 묘 자리를 본 후에 
날자를 받아 이장을 하게 되었다.

모친의 시신은 너무 끔찍했다.

이장 하던 날 내 아내와 나는 너무도 끔찍한 정경에 몸서리를 쳤다.
모친의 관은 물에 잠겨 있었고 그 관 뚜껑을 열었을 때 떨어진 목이 물에 
뜨 다니다 발 뒤꿈치에 와 있는 것이 아닌가?

누가 풍수설을 미신이라 했는가? 
누가 명당을 쓸데없는 잡소리라 하는가? 

가정의 평온을 되찾다.

모친의 묘를 이장 한 후 우리 가정은 이상하리만큼 평온했다. 
그 잦던 우환도 질고도 깨끗이 없어졌고 불면증에 시달리던 아내도 
숙면을 하여 평온을 되찾았다. 
모든 게 신부님의 은혜였다. 끝.

 

선인수맥감정연구회  010-6277-119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