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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전국출장 수맥과터 진단전문/ 주택(APT.전원주택) 산소,사무실 감정 010 6277 119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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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울밤 화롯불

by 宣人 2012. 2. 20.

화로란 :  숯불을 담아 놓는 그릇이며. 주로 불씨를 보존하거나 난방을 위하여 쓴다.

 

겨울철 장작불을 때고 불씨가 남아 있는 숯불을 화로에 담아 방안에 놓아두는데, 이것이 화롯불이다.
궁핍했던 시절, 화로는 가정의 작은 태양이었다.

 

 

화로만큼은 상하 계층 및 빈부의 차이 없이 장소에 구애받지 않고 두루 쓰이는 살림살이였다.
돌화로는 따뜻한 기운을 오래 간직할 뿐 아니라, 공예적인 아름다움이 깃들어서 상류층에서 사랑을 받았다.

 

화로의 곁에는 쇠로 만든 ‘부젓가락’과 ‘부손(불손)’이 준비돼 있어 언제나 불을 다독거려 불씨가 온전히 보존되도록 했었다.
꼭두새벽부터 우리의 어머니들은 화로의 불씨를 부엌으로 옮기며 하루 일과(日課)를 시작하셨고,
저녁식사 후 설거지를 마친 후 새로 담은 화롯불을 들고 들어오시며, 그날 일과를 마무리하셨다.

 


화로는 언제나 따뜻한 불씨로 우리의 삶을 덥혀 주던 생활도구로
할아버지가 아들에게 아들은 또 그의 아들에게까지 대물림 되며 언제나 따스함을 제공했고
또한 가족 간의 화목한 정(情)을 일깨웠다.

불씨를 덮어 잘 다독거리고 오랫동안 불씨가 꺼지지 않도록 했으며
이 불은 어른들의 담뱃불, 다듬이질, 찬 음식 덥히기, 또한 다음날 아침 아궁이의 불씨로 사용되기도 했다.

 

 

 

 

특히 겨울철, 화로는 바깥 나들이에서 돌아오는 가족들의 추위를 녹이게도 했고
밤·고구마 등을 구워 먹기도 했다.

 

 

 


할아버지의 허리춤 누적이 찬 쌈지에서 눅눅한 황초를 꺼내도록 해 담뱃대에 재고

화롯불에서 장죽의 길이만큼 얼굴을 젖히고는
천천히 물부리를 빨아 입 언저리에서 엷은 안개까지 피워 내도록 하기도 했다.

 

어쩌다 화로의 불이 꺼져 이웃집에 불씨를 얻으러 가면..

 

그것은 여자의 게으름 탓으로 돌렸기에 이 보다 더한 부끄러움도 없었다.

 
또 불씨를 나누어주면 그 집의 살림이 나간다는 속설(俗說)도 있어 누구나 거절하기 일쑤여서

화롯불을 구하기는 하나의 고통이기도 했다.
 

 

 

 

옷을 지을 때 마무리에 쓰이는 인두를 꽂아 사용할 수 있었다.
인두는 바느질할 때 불에 달구어 천의 구김살을 눌러 펴거나 솔기를 꺾어 누르는 데 쓰는 기구.

쇠로 만들며 바닥이 반반하다

'규중칠무쟁론기'라는 옛수필에서
아씨방 일곱동무 - 바늘,실,골무,다리미,가위,자,인두- 는 서로가 제일 중요하다고 뽐내다가
결국 모두가 함께 소중하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기원후 4세기부터 중국인들은 손잡이가 달린 놋쇠냄비에 잉걸불을 담아 인두로 사용했다
서양에서는 유리나 대리석등을 인두로 사용했다고 한다.

 

 

 

 
오리엔트에서 다리미질은 사산조 페르시아시대부터,유럽의 경우 12세기부터 시작 하였다
초상화나 조각상에 나타난 의상을 보면은 규칙적인 주름이 빳빳하게 잡혀있는 것으로 미루어 짐작 할수있다.
유럽의 가장 오래된 인두 중에 오늘날까지 전해 오는 것은 거의 16세기 이후에 제작 되었다
17세기에 이르러 인두에 대한 공식적인 언급이 된다


여러형태를 거쳐 19세기에 화덕에 열을 달구는 세탁소 인두가 등장한다
같은시기에 석탄이외의 난방시설 개발로 온수 가스 알코올 등을 이용한 인두가 등장한다
1931년 프랑스에서 최초로 칼로르라는 전기 다리미가 출현한다
전기다리미는 1891년 미국의 실리가 발명했다     
 

 

안방에 놓인 화로에는 늘 ‘부젓가락’과 ‘윤디(인두)’가 꽂혀 있었다.
인두는 그 시절 가정 필수품(必需品)의 하나로, 옷고름이나 ‘동정’ 깃을 펼 때에

섬세(纖細)하고도 아름다운 곡선을 만들어주던 도구였다.
새색시가 화롯불 속에다 인두를 푹 파묻어 놓고 ‘동정’ 깃을 펼 때면,

불기를 받아 발그레하게 상기된 얼굴이 그렇게 고울 수가 없었다.

 


어릴 때는 화로에 묻어놓은 인두를 뽑아서 장난을 치다가 어머니에게 야단을 맞았던 때도 부지기수였다.
화로 속에 꽂아 둔 인두를 쑥 뽑아내면, 이게 얼마나 달아올랐는지 인두 바닥에다 침을 살짝 튀겨본다.
그러면 지지직하는 소리가 나면서 김이 물씬 솟아났고,

그게 재미있어서 계속 그 장난을 치다가 어머니한테 들켜서 꾸중을 듣는 것이다.

 
화롯불 가에서는 갖가지 놀이를 하고, 장난감을 만들기도 했었다.
화롯가에서 촛동강(양초 토막)을 말랑말랑하게 녹여서 돼지도 만들고, 황소도 만들고, 자동차도 만들곤 했었다.
성미가 급한 아이들은 촛동강이 어서 물렁물렁해지라고 화롯불 속에 파묻어 놓기도 했는데,

 
이렇게 하면 온 방안에 양초냄새가 ‘동천’을 하기 때문에 야단을 맟기 일쑤였다.
초가 타는 냄새가 워낙 고약하여 어른들한테 꾸지람 듣는 것은 당근이었다.
야단을 맞고, 양초공예 놀이가 시들해지면, 도화지(圖畵紙)에 촛동강으로 글씨를 써서 화롯불에 쪼이는 놀이로 바뀐다.


도화지에 글씨를 쓴 후 화롯불에 쪼이면, 묻은 양초가 녹으면서 선명(鮮明)한 글씨가 드러나는데,

이때도 양초냄새가 나기는 마찬가지여서
결국 방에서 쫓겨나는 징벌(懲罰)을 받기도 했었다.

 

 

 

 

 

그 시절의 안방 화롯불에는 어머니의 자식들에 대한 사랑이 듬뿍 담겨 있었다.
겨울철 추운 날, 어머니는 화로의 잿불을 ‘부젓가락’으로 살짝 헤집어놓은 후,

까마귀사촌 같은 자식들의 꽁꽁 언 손을 끌어당겨 녹여주곤 하셨다.


아버지께서도 아이들을 위해 아침마다 화롯불을 만들어 주셨다.
추운 겨울날 아침, 아이들은 고양이 세수를 하고 방으로 후다닥 들어간다.
아랫목은 엉덩이를 대지 못할 정도로 뜨겁지만,

문풍지 틈으로 들어오는 찬 공기 때문에 아이들은 다시 이불 속으로 들어간다.

 


가마솥에 쇠죽을 끓인 아버지는 아궁이에서 활짝 피어 있는 이글이글 한 숯불을 ‘불고무래’로 꺼내

‘부등가리’로 화로에 옮겨 담아 방안으로 가지고 들어오신다.

이불을 뒤집어쓰고 있던 아이들은 새로 담아온 화롯불 주위에 둘러앉아 손바닥을 펴들고 불을 쬔다.

냉기(冷氣)가 돌았던 방안이 금세 훈훈해지고 어느새 따뜻한 새아침이 시작된다.

 

 

 

 

 

점심때에는 ‘부젓가락’이나 ‘부삽’을 화로 위에 가로로 걸쳐놓고 아침에 먹었던 국이나 된장 뚝배기를 데워 먹는다.

 

 

 

 


혹여 생선토막이라도 있는 날이면 화로에 석쇠를 걸쳐놓고 굽기도 했다.
상이 다 차려지면 아랫목에 묻어 두었던 밥그릇을 줄줄이 꺼내 따뜻한 식사를 할 수 있었다.
화로는 아이들의 겨울철 ‘주전부리’를 위한 장소가 되기도 했다.


화로에 마른 떡을 석쇠에 올려 구워먹기도 했고, 불길이 사그라졌을 때는 고구마를 잿불에 묻어 두었다가

달콤한 냄새가 나기 시작하면 ‘부젓가락’으로 찔러보며 군침을 흘리기도 했다.
노랗게 익은 군고구마를 젓가락에 꽂아 떠  먹는 동치미 한 사발은 지금의 ‘주스’보다 더 상큼하고 시원했다.

 

 

 

 

화로 앞에 앉아서 잠 못 들어 하다

 

겨울밤 화롯불을 떠올리면‘향수’라는 詩“

 

…질 화로에 재가 식어지면,
비인 밭에 밤바람 소리 말을 달리고,
엷은 조름에 겨운 늙으신 아버지가 짚 베개를 돋아 고이시는 곳,
그곳이 차마 꿈엔들 잊힐리야…”

 

하는 한 대목이 떠오른다.

시인 이군옥이 어느 날 밤 화롯가에 앉아 잠 못 이루는 자신의 심정을 詩로 남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