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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인수맥감정연구회 풍수정보-네 번 이장, 조선 왕실 몰락 재촉

by 宣人 2011. 11. 11.

네 번 이장, 조선 왕실 몰락 재촉

명성황후의 친정아버지 민치록의 마지막 이장지(충남 보령).

역사적으로 어느 한 시대의 풍수 행태를 들여다보면 그 사회가 건전한지 아니면 몰락하고 있는지를 가늠해볼 수 있다. 그 좋은 사례로 구한말 명성황후(민비)의 풍수 행태를 꼽을 수 있다.

그 전말은 이러하다. 1866년 경기 여주에서 계모와 단둘이 살던 가난한 처녀가 왕비로 간택됐다. 훗날 명성황후로 역사에 기록되는 그녀는 그러나 왕비가 된 후에도 그다지 순탄한 삶을 살지 못했다.

그녀에게 닥친 첫번째 불행은 왕비인 자신보다 상궁이 먼저 왕자를 생산한 사건이었다. 게다가 시아버지인 흥선대원군까지 그 왕자를 애지중지하며 감싸는 바람에 그녀는 질투심과 조바심으로 거의 제정신이 아니었다. 왕비가 대통을 이을 왕자를 생산하지 못할 경우 그것은 궁내 권력구도에서 왕비에게 치명적인 약점이 된다.

민비는 갖은 노력 끝에 1871년 그토록 고대하던 왕자를 낳았다. 그러나 왕자는 태어날 때부터 항문이 없어 생후 며칠 만에 결국 죽고 말았다. 이에 속히 둘째 왕자를 낳고 싶었던 명성황후는 전국의 명산대천 곳곳에 제를 드리게 하고, 용하다는 점쟁이와 무당들을 불러들이기 시작하였다.

민비가 무속과 잡술을 맹신했다는 사실은 여러 기록에서 드러난다. 왕실과 친하게 지냈던 언더우드(H. G. Underwood) 부인의 기록에도 나와 있고, 구한말의 대표적 지식인 황현(黃玹)은 이를 비꼬아 당시 조선을 “귀신의 나라(鬼國)”라고 부르기까지 했다. 심지어 남편인 고종조차도 임오군란(1882) 후 여덟 가지 죄목을 들어 자신의 부덕함을 자책했을 때 “궁궐이 정숙지 못하여 부녀자(민비를 가리킴)가 치성을 자주 하니 이것이 나의 죄”라고 했을 정도였다.

민비는 풍수에도 광신적인 집착을 보였다. 민비의 친정아버지 민치록은 1858년 여주 금교리에 안장되었는데, 민비는 1866년부터 자신이 시해당하기 1년 전인 1894년까지 28년 동안 무려 네 번이나 친정아버지의 무덤을 옮겼다. 여주→제천→이천→광주(廣州)→보령 순서로 7년에 한 번꼴로 이장하였던 것. 마지막 이장지인 충남 보령의 무덤 터는 당시 충청도 수군절도사 이봉구(李鳳九)가 천하의 명당이라고 소개한 곳이었다.

일반 서민이나 사대부의 경우에는 네 번 이장하는 것이 별일이 아닐 수도 있다. 그러나 왕실의 경우 상황이 달라진다. 과거 풍수설에서는 주산에서 이어지는 내룡(來龍)과 무덤 주변의 사방을 둘러싸는 사신사(四神砂·청룡, 백호, 주작, 현무)를 중시했기 때문에 왕가가 무덤을 쓸 경우 다른 사람들은 일절 그 주변에 무덤을 쓰지 못하게 하였다. 이 법규는 ‘용호내금양처(龍虎內禁養處)’라는 말로 조선의 법전인 속대전(續大典)에도 명기될 정도였다.

게다가 무덤 일대는 ‘사패지(賜牌地·나라에서 내려주던 땅)’가 되어, 백성들은 토지를 징발당하고 부역에 동원된다. 이때 징발당하는 범위가 ‘묘지에서 앉거나 서서 보이는 곳(坐立見處)’ 혹은 ‘눕거나 서서 보이는 곳(臥立見處)’인데, 한마디로 눈에 보이는 곳은 모두 ‘사패지’가 되는 것이다. 그러니 민비가 이장을 네 번이나 하는 과정에서 얼마나 많은 백성들의 원성을 샀을지는 충분히 짐작할 수 있다.

그러나 충남 보령으로 이장한 지 1년 후인 1895년 민비는 일본인들의 손에 죽임을 당한다. 명성황후에 대한 역사적 평가는 차치하고라도 풍수에 대한 그녀의 신봉은 좀 지나친 감이 있다. 풍수의 고전인 ‘발미론(發微論)’에서는 이러한 풍수 행태에 대해 다음과 같이 경고하고 있다.

“나쁜 업보가 가득하면 하늘은 반드시 나쁜 땅으로 대응하는데, 그 자손이 화를 입는 것은 바로 이러한 까닭에서다.”

실제로 명성황후의 친정아버지 무덤은 언뜻 보아 ‘천하의 명당’처럼 보이지만 실은 ‘거짓 명당(虛花)’에 지나지 않는다. 민비의 몰락이 아니라 조선의 몰락을 상징하는 조선 왕실 최후의 풍수 추태로 기록될 일이다

 

 

 

                              선인수맥감정연구회 010-6277-119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