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복 59주년이다. 광복이 되던 해에 태어난 아기가 환갑이 돼 가는데 일본은 아직도 독도가 자기네땅이라고 우기고, 이제는 중국마저도 고구려가 자기들 지방정부라고 떼를 쓰고 있다.
광복 59주년을 맞아 경주 속에 있는 일본의 풍수침략의 현장을 찾아보면서, 사적지 내에 70여년간을 버젓이 버티고 서 있는 조선총독부 비석을 보면서, 해방의 의미를 다시금 되새겨 본다.
명활산성의 조선총독부 고적비
경주 보문관광단지로 들어가는 보문삼거리에서 불국사 쪽으로 빠지는 오른쪽 길을 가다 200미터쯤 가면 오른쪽에 공터가 보이고 새로 축조한 명활산성의 일부가 보인다. 신라시대에 축성됐다.
이 성벽을 중심으로 왼쪽으로 보문호수를 휘감아 도는 도로와 맞물려 약 6km에 걸쳐 산성이 축조돼 있다.
명활산성에는 3종류의 비석이 있다. 하나는 명활산성작성비, 다른 하나는 대한민국이 명활산성 입구에 세운 사적비, 나머지는 조선총독부가 세운 고적비이다. 조선총독부가 세운 고적비는 명활산성에 2기가 남아 있다.
명활산성 작성비는 축조 책임자와 작업 내용 등을 적은 비로 지금은 국립경주박물관에 소장돼 있다. 대한민국 명의의 사적비는 이곳이 47호이며 63년에 지정됐다고 적혀져 있다.사적지에 가면 어디에나 있는 비석이다.
이맛살을 찌푸리게 하는 것은 조선총독부 비석. 조선총독부 비석은 공터에서 왼쪽으로 꺾어 성벽을 따라 20여분 걸어가면 있다. 군데군데 돌로 쌓은 성벽이 무너져 내려 있고 더러는 돌무더기가 길게 이어져 성벽 형태를 유지하고 있는데 성벽의 끝에 비석이 서 있다. 아래는 가파른 낭떠러지다.
높이는 87cm, 정면 너비 20cm에 옆면 너비가 23cm 정도이며 세월이 흐르면서 땅속에 파 묻혔던 밑둥치가 20여cm 정도 드러나 있으며 낭떠러지 쪽으로 약간 기울어져 있다.
앞면에는 ‘조선총독부’라고 음각돼 있고 뒷면에는 '고적 제 16호'라고 기록돼 있다. 음각된 글자를 거의 알아 볼수 없어 하얀 분필을 글자 위에 입히자 ‘조선총독부’라는 글자가 드러났다.
또다른 조선총독부비는 보문단지를 끼고 있는 정토암 암자 담벽 위에 세워져 있다. 이 담벽은 본래 성벽인데 정토암이 들어서면서 성벽이 그대로 정토암의 담이 돼 버린 것이다. 그래서 비석이 정토암 담벽위에 서 있는 것으로 보이는 것이다.
경주시 관계자는 광복 59년이 되도록 조선총독부 비석이 그대로 있는 것에 대해서 묵묵부답이다. 예산 때문이냐는 질문에 대해 “그런 이유도 있고...” 라며 말끝을 흐렸다.
광복 59년이 되도록 이곳은 비석만 놓고 본다면 아직 일본과 대한민국이 영토분쟁을 일으키고 있는 것이 아닌가 하고 착각이 든다. 왜냐하면 대한민국사적비와 조선총독부의 고적비가 함께 있으니까 말이다.
명활산성은?
명활산성은 경주시 보문호수의 동쪽 도로를 끼고 있다. 해발 252m로 성벽이 6km에 이른다. 사적47호 정확한 축성 연대는 알 수 없으나 405년( 실성왕 4년)에 왜병이 명활성을 공격하였다는 기록으로 보아 그 이전에 축성 된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당시 신라는 북으로는 고구려, 동으로는 왜구의 침입을 자주 받았는데 이 성은 왜구의 침략에 대비하기 위해 만들어진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명활산성은 우리나라 연의 유래와 관계가 있다. 신라 진덕여왕 1년, 여자가 왕이 된 것에 반대하는 비담 염종이 반란을 일으켜 명활산성에 자리를 잡고 있었다. 당시 김유신은 반월성에서 진을 치고 반란군의 토벌을 맡게 됐는데 어느날 밤하늘의 별이 반월성쪽으로 떨어졌다. 김유신측 군사들의 사기가 크게 떨어졌다. 김유신은 큰 연에 불을 붙여 하늘로 띄워 명활산성쪽에 떨어지도록 했다. 그 후 김유신군은 사기가 올라 비담 염종을 쳐 반란을 진압했던 것으로 삼국사기는 전한다.
보문호와 맞닿아 있으나 별로 알려지지 않은 곳이기 때문인지 관광객은 거의 없고 입구의 약수터를 찾는 사람들이 더러 있는 정도다. 물맛은 시원하고 좋다. 조선총독부 비석을 찾아가려면 입구에서 왼쪽으로 한사람 정도 들어갈 수 있는 길은 찾아야 한다. 새로 축조한 산성의 왼쪽으로 들어가 사적비 아래에 나 있는 작은 소로에서 접어들거나 사적지 위쪽에 있는 소로, 마지막으로 새로 축조한 산성과 맞닿아 있는 농막 옆의 왼쪽 소로에서 출발해 길을 따라 가면 된다.
안압지와 사천왕사지동해남부선 철도
안압지는 반월성 북동쪽에 있는 신라시대 궁중인 임해전의 궁중연못이다. 당나라군과 치열한 전쟁을 벌이던 문무왕 14년 674년에 완성됐다. 이후 당나라군을 몰아내고 왕이 축하연을 벌였던 곳이다.
일제는 안압지가 있는 임해전 북쪽 2m 뒤에 동해남부선 철도를 냈다. 풍수관계자들은 집 뒤에는 나무를 심어 수벽(樹壁)을 만들어야 오랫동안 평안을 유지 할 수 있는데 일제는 왕궁뒤에 수벽과 정반대인 화(火), 즉 기차를 지나다니게 함으로써 민족의 평안을 깨뜨리게 할 작정이었다고 분석했다. 현재 안압지 앞에는 황화코스모스와 연꽃무리가 장관을 이루고 경관조명을 설치, 밤마다 환상의 밤풍경을 연출해 묘한 대조를 이루고 있다.
사천왕사지는 안압지에서 불국사쪽으로 가다 신문왕릉 못미쳐 통일전으로 빠지는 삼거리 왼쪽에 있다. 신유림이라 불리는 낭산 자락이다.
문무왕 19년(679)에 당나라 군사의 공격을 부처님의 힘을 빌어 퇴치하기 위해 세웠던 신라의 최대 호국사찰중 하나이다.
일제는 이 사찰의 가운데인 금당지와 강당지 사이를 관통하는 철도를 내 민족의 정기를 훼손하려 했다. 지금은 풀만 무성하게 자라 있고 절터 곳곳에 초석이 흩어져 있다. 길옆에 당간지주와 석조 귀부, 동서목탑지, 금당지, 좌우 경루 등이 남아 있다.
안압지와 사천왕사지를 지나는 동해남부선은 1918년 경주와 포항간 철도 였으나 1935년 울산을 거쳐 부산까지 연장됐다. 총연장 147.8km로 동해안에서 나는 수산물과 자원들을 일본으로 수송하기 위해 건설됐다.
김유신 장군릉과 무열왕릉
김유신 장군릉은 경주 수도산 정상에 있다. 봄에는 도로 양편에 늘어선 벚나무들이 벚꽃 터널을 만들어 관광객을 유혹하고 여름에는 여름대로 숲과 나무가 울창해 시민들이 즐겨 찾고 있다.
삼국통일의 일등공신인 김유신 장군릉 20여미터 아래에는 중앙선 기차 터널이 뚫려져 있다.
일반적으로 상상할 수도 없는 이같은 만행은 일제가 지기를 끊어 놓기 위해 철도를 개설하면서 만든 것이다. 경주에서 대구로 가는 중앙선 철도다. 터널의 길이는 약 50여m. 포항서 대구로 가는 통일호, 울산,포항에서 경주로 거쳐 서울로 가는 새마을호, 무궁화등이 이곳을 지나다닌다.
무열왕릉은 경주 터미널에서 건천 가는 길에 있다. 터미널에서 서천교를 건너서 왼쪽으로 꺾어 500여미터 가면 주차장이 나오고 길 건너편이 무열왕릉이다. 주차장에서 보이는 능이 김인문능이다.
김인문은 무열왕의 둘째 아들이고 문무왕의 동생이다. 문장가였으며 외교가로 신라통일의 한축을 담당했다. 이 부자는 죽어서 어깨를 나란히 하고 서악동에 묻혔다. 그런데 일제가 50여미터 정도 되는 부자간의 능 사이에 도로를 냈다. 같은 이유에서이다.
중앙선은 서울 청량리와 경주를 잇는 총연장 382.8km 철도로 39년 서울과 영평 구간을 시작으로 40년 양평-원주 구간이 증설됐다가 일제 말기인 42년 현재의 구간으로 연장됐다.안압지와 사천왕사지는 일제말기에 파괴됐던 것이다.
동국대 사회교육원에서 풍수지리를 강의 하는 박무흠씨는 “경주의 사찰이나 왕릉등은 당시로서는 최고의 명당자리에 들어섰다” 며 “ 때문에 이같은 사적지인근에 도로를 내거나 철도를 개설하면 자연스럽게 지맥이 차단되고 인간의 품성을 어지럽히는 나쁜 기를 받게 되며 나라 전체로 볼때 민족의 정기를 말살하는 효과를 볼 수 있다”고 일제의 만행을 규탄했다.
경주 새롭게 태어날까?
건설교통부가 2012년에 경주 시내를 철도를 걷기로 했다. 경부고속철도가 들어서면 통합역이 화천에 들어서는데 이때 시내를 지나가는 동해남부선과 중앙선을 철거하겠다는 것이다.
당연히 안압지 사천왕사지를 지나는 동해남부선 철도와 김유신장군릉 아래 철도 터널도 없어지게 된다.
이에따라 경주시는 올해 60억원의 예산을 들여 신라왕경터 복원을 전제로한 고속철도 신경주역 노선 기본계획을 수립해 2012년까지 마무리 짓기로 했다.
경주지역 문화단체들은 “동해남부선과 중앙선이 옮겨지면 안압지와 사천왕사지, 김유신장군릉등 철도 때문에 신음하던 사적지가 제모습을 찾게 될 것”이라고 환영했다. 이들은 또 “지난 30~40년대에 일본이 민족정기를 말살하기 위해 철도를 만든 만큼 경주시가 복원 계획을 잘 세워 겨레의 숨통을 틔울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해 주기 바란다”고 말했다.
박무흠동국대 경주캠퍼스 사회교육원 풍수지리 강사
동국대 경주캠퍼스 사회교육원에서 풍수지리 강의를 맡고 있는 박무흠씨는 경주 서악동의 무열왕릉 앞 도로, 김유신장군릉 아래 중앙선 철도 터널, 안압지 뒤와 사천왕사지를 관통하는 동해남부선 철도야 말로 풍수침략의 전형적인 사례라고 말했다.
박씨는 경주지역에서 다른 지역과는 달리 쇠말뚝이 발견 되지 않은 것은 경주가 신라 천년을 이어온 민족 역사의 발상지 같은 곳이기 때문에 굳이 쇠말뚝을 박거나 하지 않고 대표적인 사적지에 대한 훼손만으로도 민족정기를 차단하기에 충분하다고 판단했을 가능성이 높다고 말했다.
박씨는 풍수는 땅속의 진동과 땅위의 파동등 에너지가 서로 어떻게 반응하고 영향을 주는가를 따지고 그것이 궁극적으로 사람의 삶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 가를 밝히는 것인데 일제는 강점기에 신라천년의 고도인 경주의 주요 사적지에 도로와 철도를 내면서 의도적으로 지기를 차단해 민족정기를 훼손하려 했다고 말했다.
박씨는 김유신장군릉의 경우 능 아래를 파헤쳐 터널을 만들어 땅속의 에너지와 땅위의 에너지 흐름을 차단하고 방해했다며 김유신장군이 삼국통일을 이룬 위대한 인물이라는 점을 고려했을 것이라고 말했다.
박씨는 또 무열왕릉 앞의 경주-건천간 도로, 안압지 뒤의 동해남부선 철도,사천왕사지의 철도도 같은 맥락에서 봐야한다며 왜 정부가 중앙청같은 곳은 철거를 하면서 우리나라 대표적인 역사도시인 경주의 풍수침략에 대해서는 무방비로 있는지 답답해 했다.
박씨는 앞으로 고속철도 경주역이 들어서면 철도는 걷어지겠지만 일제가 끊어 놓은 지기를 회복하는 방안은 반드시 마련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선인수맥감정연구회 010-6277-119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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