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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수맥의 모든것 ▶/§ 명당(明堂)을 찾아서

선인수맥감정연구회 수맥정보-위창 오세창/호암 문일평 선생묘

by 宣人 2008. 10. 27.

선인수맥감정연구회 수맥정보

필자의 수맥진단 경험에 의하면 대한의 독립을 위해 귀하신몸 이 나라에 바치신 애국지사들의 수 많은 묘들이

수맥유해파의 영향을 받고 있었다.

효창공원, 국립묘지, 망우산 아래 망우리 공원내,그리고 전국의 산야에 모셔진 애국,독립투사들의 묘들이 수맥의

영향을 받고 있다는 것은 그 후손들의 삶을 모습을 보면 쉽게 이해가 된다.

이번역시 망우리 공원내에 안장된 위창 오세창 과 호암 문일평 선생의 묘를 진단해본 결과 역시나 수맥유해파의

영향을 받고 있다는 점이다. 떠날수는 있어도 다시는 들어올 수 없는 망우산 아래 망우리 공원내 묘지들은 차츰

차츰 화장과 이장으로 줄고있는 추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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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창 오세창 선생 약력★

한국의 독립운동가


   민족대표 33인 중의 한 사람으로 서울 출신이며, 천도교(天道敎)인이다.
   23세의 약관으로 벼슬길에 나아가 박문국 주사(博文局主事)가 되었고, 우리나라 최초의 언론기관인 한성순보(漢城旬報)의 기자가 되어 문필로써 명성을 떨쳤다. 1894년(고종 31)에 군국기무처(軍國機務處)의 낭청・총재비서관(郎廳・總裁秘書官)이 되었다가 농상공부 참의(農商工部參議), 우정국 통신국장(郵政局通信局長)을 역임했다. 1902년(광무6) 개화당(開化黨) 사건으로 일본에 망명하였다가, 그 곳에서 손병희(孫秉熙)・양한묵(梁漢默)등을 만나 천도교에 입교하였다. 1917년 귀국하여 만세보(萬歲報)와 대한민보사(大韓民報社)를 창설하고, 그 사장으로 취임하여 민족계몽운동을 전개하였다.

 

 1919년 2월 미국 대통령 윌슨의 민족자결주의에 영향을 받아, 손병희・최린(崔隣)・권동진(權東鎭)등과 함께 조선의 독립운동을 전개하기로 결의하고, 우선 동지를 포섭하기로 하였다. 이에 2월 10일경 최린과 최남선(崔南善)이 협의하고, 최남선이 독립선언서를 초안하였으며 손병희・최 린・권동진 등과 이를 검토하고 그 내용에 동의하였다. 2월 25일에는 손병희・권동진과 함께 천도교 기도회 종료보고와 국장에 참배키 위해 상경한 천도교 도사(道師) 임예환(林禮煥)・나인협(羅仁協)・홍기조(洪基兆)・박준승(朴準承)・홍병기(洪秉箕)・교도 김완규(金完圭)등에게 독립운동에 관한 계획을 알려 찬동을 얻었는데, 특히 그는 천도교 월보과장 이종일(李鍾一)을 동지로 끌어 들였다. 그는 2월 27일 그들과 함께 재동(齋洞) 김상규(金相奎)의 집에 모여, 독립선언서와 기타 문서의 초안을 보고 이에 찬동하여 민족대표로서 서명 날인하였다.

 

 3월 1일 오후 2시경 인사동(仁寺洞)의 태화관(泰華館)에 손병희 등과 민족대표로 참석하여 독립선어서를 회람하고 만세삼창을 외친 뒤, 출동한 일본경찰에 의해 체포되어 경시청총감부(警視廳摠監部)에 구금되었다가,1920년 경성복심법원에서 소위 보안법과 출판법 위반 혐의로 3년형을 선고받고 서대문 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렀다. 출옥 후에도 일본경찰의 감시를 피하여 독립운동자들과 극비리에 연락하였다. 광복후에는 민주의원 의원(民主議院議員)을 겸하였고, 대한독립촉성국민회장(大韓獨立促成國民會長)과 전국애국단체총연합회(全國愛國團體總聯合會)회장을 맡아보며 독립국가 건설에 공헌하였다.
정부에서는 그의 공훈을 기리기 위하여 1962년에 건국훈장 대통령장을 추서하였다

 

★호암 문일평 선생 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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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약력-

평안도 의주 출신이다. 본관은 남평(). 호는 호암(). 러·일전쟁이 한창이던 1905년 일본으로 유학을 떠나 일본어를 배운 후, 1907년 메이지학원[] 보통부 3학년에 입학하였다. 거기에서 홍명희·이광수()와 함께 공부하였다. 1910년 봄 중학교를 마치고, 바로 귀국하여 평양의 대성(), 의주의 양실(), 서울의 경신()학교에서 교편을 잡는 한편, 최남선이 운영하는 광문회()에도 관여하였다.

1년 간의 교편생활을 접고, 1911년 다시 일본으로 건너가 정치학을 공부하기 위해 와세다대학[]에 입학하였다. 그곳에서 안재홍()·김성수(송진우() 등과 교유하였다. 그러나 2년만 다니고 공부를 중단하고 생각을 바꾸어, 1912년 중국으로 건너가 다른 생활을 찾았다. 남경과 상해를 오가며 생활하다가, 상해의 프랑스 조계()에서 생활하면서 중국신문사 대공화보()에서 일어번역과 논설을 맡아 썼다. 당시에 홍명희(조소앙(정인보()와 교류하였으며, 신규식()이 주도한 동제사()에 참여하였고, 신채호()와 박달학원()을 세워 교사로 재직하였다.

중국에서 귀국한(1914) 후, 한 때 시골에서 농사를 짓다가, 1919년 3월 12일 독립선언서의 일종인 ‘애원서()'를 낭독하였다. 이 사건으로 체포되어 8개월간 복역하였다. 그 후 그는 문필가로서의 활동을 적극적으로 하며, 시, 역사논설, 역사이야기, 수필 등을 집필하여 여러 신문이나 문학지에 게재하였다. 주로 역사 소재를 갖는 역사소설, 역사 이야기, 역사 수필 등이 주류를 이루며, 신문에 중장기 회를 연재하기도 하였다. 특히 그가 언론사인 조선일보사에서 근무한 것이(1928 ~1931, 1933 ~ 1939) 큰 영향을 주었다. 그가 발표한 시, 역사논설, 수필 등이 모두 100편을 넘는다. 그의 글이 게재된 문학지는 《개벽()》·《청년》·《학생계》·《동명()》·《동광》·《한빛》·《별건곤()》·《신생》·《삼천리》·《소년》·《서울》 등이다. 한편, 교직에도 재직하며 교육에도 헌신하였다. 중동()·중앙()·배재()·송도() 등의 학교에서 후진 양성에 노력하였다.

특히, 그의 짧은 일생 가운데 말년에 해당하는 시기인 1933년부터 사망 시까지, 《조선일보》의 편집 고문직을 맡으면서 언론을 통한 역사의 대중화에 힘을 기울였다. 우리의 역사 속에서 민족문화와 민족정신을 찾아 널리 보급하려고 평생 노력하였다. 그의 역사 연구는 역사학자적 연구인 역사 사실의 기초적 연구보다는 우리 나라 역사 가운데 중요한 역사적 의미를 갖는 사실을 발굴하고, 그 의미를 강조하고 이해시키려고 노력하였다. 따라서 그가 집필한 글 가운데에는 사실에 기반을 둔 역사 이야기가 많다. 그의 역사 관련 논술이 지니는 성격을 다음과 같이 정리할 수 있다.

첫째, 역사 소재의 다양성이다. 그의 역사연구의 궁극적 목적이 역사 지식의 보급에 있었기 때문에, 한국학의 대상이 되는 것이라면 모든 것을 글의 소재로 삼았다. 우리나라의 자연(산, 폭포)·사적(-사찰)·예술·풍속 등 남들이 쉽게 연구대상으로 삼지 않는 영역까지를 두루 섭렵하였다. 그래서 그의 글은 수필적 성격을 갖는 것이 많다. 이것은 민족의 장점을 발견하여 민족의 미래 개척에 활용하기 위함이었다. 둘째, 논술의 제목이 서술성을 띈다. 《한양조()의 정치가 군상() 《사상()의 기인(》 《사()의 도() 강화(), 시()의 도() 강화()》 등에서 느낄 수 있듯이, 대중적 이미지를 갖는 제목을 많이 택하였다.

셋째, 거의가 단문으로 이루어졌다. 《대미관계 50년사》 등 몇 편의 저술을 제외하면, 그의 글은 대부분 단문이 특징이다. 넷째, 평이한 문체를 특징으로 한다. 그의 사풍()은 어려운 역사를 자신이 완전히 해득하여 이를 일반 민중에게 쉽게 이해하도록 서술하였다. 다섯째, 민족사를 지극히 객관적인 시각으로 민족적 긍지를 고양시켰다. 그것은 민족사이지만 매우 반성적 자세로 보려고 노력하였기 때문이다. 여섯째, 한국사 전체를 대상으로 하면서도, 인물연구, 역사상 민족 운명을 좌우한 사건, 문학사 등 광범위하게 접근하였다. 이처럼 그의 역사 연구는 민족사의 반성적 측면과 민족혼의 발굴적 측면에서 이루어졌다.

그는 당시 시대적 상황과 어울리는 사학의 주류인 민족의식·민족정신 고취를 핵심으로 하고 있다. 그리하여 최종 결집으로 조선정신인 ‘조선심()’을 강조하였다. 조선심은 추상적인 관념론을 벗어나 다분히 현실성을 내포하고 있다. 그 증명으로 조선심의 결정체()로서 ‘한글’을 들었으며, 조선심은 세종대왕에 의하여 구체적으로 실현되었다고 강조하였다. 나아가 실학사상도 강조하였는데, ‘실사구시’ 정신을 자아의 재검토·재수립으로 정의하였고, 이는 조선심의 재현이라고 보았다. 결국, ‘조선심’은 우리 역사의 구석구석에서 찾을 수 있을 뿐만 아니라, 무지한 민중도 쉽게 지닐 수 있는 것이라고 강조하였다.

그는 또한 국가 지도자나 일반생활인도 강한 현실성을 가져야 한다고 강조하였다. 최선의 외교자세로서 타산성과 실리를 우선으로 하였다. 여기서 그의 사학정신은 순수성보다는 강한 현실성을 띠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역사 비판을 통한 독특한 사론()을 제시하기보다는, 사실()을 흥미롭게 재구성하여 역사의 대중화에 힘썼다. 그의 민족사에 대해서도 결코 과대()하거나 부회(), 독단()을 허용하지도 않았다. 그저 역사를 재미있게 읽는 역사로 부담없이 다가서도록 대중화하였다. 그는 건강이 좋지 않아 52세의 나이에 타계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