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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인수맥감정연구회 풍류편-시인 박인환 묘

by 宣人 2008. 10. 28.

선인수맥감정연구회 풍류편

박인환(朴寅煥.1926.8.15∼1956.3.20)
시인. 본관은 밀양(密陽). 강원도 인제 출신. 아버지 광선(光善)과 어머니 함숙형(咸淑亨)의 4남 2녀 중 장남이다. 1939년 서울 덕수공립소학교를 졸업하고 경기공립중학교에 입학하였으나 1941년 자퇴하고, 한성학교를 거쳐 1944년 황해도 재령의 명신중학교를 졸업하였다. 그 해 평양의학전문학교에 입학하였으나 8ㆍ15광복으로 학업을 중단하였다.

   그 뒤 상경하여 [마리서사(茉莉書肆)]라는 서점을 경영하면서 김광균(金光均)ㆍ이한직(李漢稷)ㆍ김수영(金洙暎)ㆍ김경린(金璟麟)ㆍ오장환(吳章煥)ㆍ김기림(金起林) 등과 친교를 맺기도 하였다. 1948년 서점을 그만두면서 이정숙(李丁淑)과 혼인하였다. 그 해에 자유신문사, 이듬해에 경향신문사에 입사하여 기자로 근무하기도 하였다.

   1949년에는 김병욱(金秉旭)ㆍ김경린 등과 동인지 [신시론(新詩論)]을 발간하였으며, 1950년에는 김차영(金次榮)ㆍ김규동(金奎東)ㆍ이봉래(李奉來) 등과 피난지 부산에서 동인 ‘후반기(後半紀)’를 결성하여 모더니즘운동을 전개하기도 하였다. 1951년에는 육군소속 종군작가단에 참여한 바 있고, 1955년에는 직장인 대한해운공사의 일 관계로 남해호(南海號) 사무장의 임무를 띠고 미국에 다녀오기도 하였다. 1955년 첫 시집 <박인환선시집(朴寅煥選詩集)>을 낸 뒤 이듬해에 심장마비로 죽었다.

   그의 시작 활동은 1946년에 시 <거리>를 [국제신보(國際新報)]에 발표하면서부터 시작되었다. 이어 1947년에는 시 <남풍>, 영화평론 <아메리카 영화시론>을 [신천지(新天地)]에, 1948년에는 시 <지하실(地下室)>을 [민성(民聲)]에 발표하면서부터 본격적인 시작 활동이 전개되었다.

   특히, 1949년 김수영ㆍ김경린ㆍ양병식(梁秉植)ㆍ임호권(林虎權) 등과 함께 낸 합동시집 <새로운 도시와 시민들의 합창>은 광복 후 본격적인 시인들의 등장을 알려주는 신호가 되었다. 1950년 후반기 동인으로 활동하면서 <살아 있는 것이 있다면> <밤의 미매장(未埋藏)> <목마와 숙녀> 등을 발표하였는데, 이런 작품들은 도시문명의 우울과 불안을 감상적인 시풍으로 노래하여 주목을 끌었다.

   1955년에 발간된 <박인환선시집>에 그의 시작품이 망라되어 있으며 특히 <목마와 숙녀>는 대표작으로 꼽히는 작품으로서 우울과 고독 등 도시적 서정과 시대적 고뇌를 노래하고 있다. 1956년 작고 1주일 전에 쓰여진 <세월이 가면>은 노래로 만들어져 널리 불리기도 하였다. 30세로 요절하였다.

   1976년 그의 20주기를 맞아 장남 세형(世馨)이 <목마와 숙녀>를 간행하였다.

【유적지】

(1) 생가터 : 강원도 인제군 남북리 303번지에서 살았다는 이야기(확인 불명)

(2) 시비 : 군축령에 세워졌던 시비는 도로 확장 관계로 철거, 군청 창고에 보관

【작품세계】

   1949년 5인 합동시집 <새로운 도시와 시민들의 합창>을 발간하여 본격적인 모더니즘의 기수로 각광을 받았다. 1940년대의 모더니스트로 알려진 이들의 모더니즘 운동은 김기림이 제창한 반자연(反自然)ㆍ반서정(反抒情)의 기치에 1940년대 후반의 시대고(苦)가 덧붙여진 것으로 확대되었다. [후반기] 동인으로 모더니즘 운동을 계속하면서도 도시적인 동시에 인생파적인 비애를 그려내고 있다는 점이 기타 동인의 시와는 다르다고 할 수 있다.

   1930년대 김기림을 중심으로 한 모더니즘을 계승한 1950년대의 후기 모더니즘의 대표적 존재이다. 이러한 후기 모더니즘의 형식적 새로움은 새로운 현실 인식과 새로운 사회적 실천에서 불가피하게 일어난 것이 아니라, 현대 서구문학의 학습을 통해서 받아들여진 것이었다. 소재는 주로 해방 후의 혼란, 6ㆍ25, 도시생활에서 취했으며, 현대 도시 문명의 퇴폐적인 모습과 그에 따른 우수(憂愁)를 표현하였다.


   해방 후 <신시론> <새로운 도시와 시민들의 합창>, [후반기] 동인을 주도하며 1950년대 전후문단의 총아로 군림했던 박인환, 10년간의 문단 생활을 통하여 숱한 일화와 화제를 뿌리다가 비극적인 삶을 마감한 박인환에 대해서 우리는 그 풍문들에 갇혀 그의  시세계의 실상을 소홀히 해온 것이 사실이다. 1950년대 풍운아, 앙팡테리블, 문단의  게릴라 명동 백작 등등 박인환에게 부여된 수많은 익명의 형상들에 의해서 시인으로서의 박인환의 참모습이 오히려 가려진 형국이다.

   박인환은 가장 1950년대적인 삶을 산 사람이다. 그가 고백했듯이 어떤 시대보다 혼란하고 불안정한 연대에 살다가 31세의 짧은 나이로 비극적 생애를 마감했다. 젊은 나이에 청소년기를 일제 식민지 치하에서 보내고, 해방 후의 극심한 좌우익의 혼란 상황을 겪었으며, 동족상잔의 비극의 현장을 종군 기자로 생생하게 체험했다. 박인환의 30년간의 삶은 격동의 한국현대사를 압축해 놓은 것이기도 하다. 따라서 박인환의 시세계는 격동의 현대사를 조망하는 하나의 관측구의 의미를 갖는다.

   박인환의 시세계는 두 가지 베일로 가려져 있다.

   하나는 문단사적인 베일이고, 또 하나는 모더니즘의 베일이다. 이러한 현상은 그가 문단의 풍운아였던 만큼 당연한 결과였는지 모르나 문단의 화제에 의해서 박인환의 시가 재단되는 일이 종종 있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문단인과 

      

인물사진

시인 박인환

출생-1926년 8월 15일 (강원도 인제)  사망-956년 3월 20일
학력-경성제일고등보통학교
데뷔-946년 국제신보 시 '거리' 발표
경력
1952년 대한해운공사 입사
1951년 육군 종군 작가단 종군 기자
1949년 새로운 도시와 시민들의 합창 간행 
 
                                                    세월이 가면

                                            지금은 그 사람 이름은 잊었지만
                                            그눈동자 입술은 내 가슴에 있네
                  
                                            바람이 불고 비가 올때도 나는 저 유리창 밖
                                            가로등 그늘의 밤을 잊지 못하지

                                            사랑은 가도 옛날은 남는것
                                            여름날의 호수가 가을의 공원

                                            그벤치위에 나뭇잎은 떨어지고
                                            나무잎은 흙이 되고 나뭇잎에 덮여서

                                            우리들 사랑이 사라진다 해도
                                            내 서늘한 가슴에 있네

 

 

목마 와 숙녀
                                                        

 

     한잔의 술을 마시고

     우리는 버지니아 울프의 생애와

     목마를 타고 떠난 숙녀의 옷자락을 이야기한다

     목마는 주인을 버리고 그저 방울 소리만 울리며

     가을 속으로 떠났다, 술병에서 별이 떨어진다

     상심한 별은 내 가슴에 가볍게 부서진다

     그러한 잠시 내가 알던 소녀는

     정원의 초목 옆에서 자라고

     문학이 죽고 인생이 죽고

     사랑의 진리마저 애증의 그림자를 버릴 때

     목마를 탄 사랑의 사람은 보이지 않는다

 

     세월은 가고 오는 것

     한때는 고립을 피하여 시들어 가고

     이제 우리는 작별하여야 한다

     술병이 바람에 쓰러지는 소리를 들으며

     늙은 여류작가의 눈을 바라다 보아야 한다

      ---------등대에----------

     불이 보이지 않아도

     그저 간직한 페시미즘의 미래를 위하여

     우리는 처량한 목마 소리를 기억하여야 한다.

     모든 것이 떠나든 죽든

     그저 가슴에 남은 희미한 의식을 붙잡고

     우리는 버지니아 울프의 서러운 이야기를 들어야 한다

     두 개의 바위 틈을 지나 청춘을 찾은 뱀과 같이

     눈을 뜨고 한잔의 술을 마셔야 한다.

 

     인생은 외롭지도 않고

     그저 잡지의 표지처럼 통속하거늘

     한탄할 그 무엇이 무서워서 우리는 떠나는 것일까

     목마는 하늘에 있고

 

 

 

     방울 소리는 귓전에 철렁거리는데

     가을 바람 소리는

     내 쓰러진 술병 속에서 목메어 우는데 -----

 

 

 망우 공원 관리 사무소에서 직진하면 두 갈래 길이 나옵니다 유명인사들 대개가 좌측 길로 들어서 한강을 바라보고 있는데 박인환 시인만은 우측에 있답니다. 죽어서도 고독을 지키는 시인의 모습일까요?

박 시인은 참으로 비극적 시대를 산 사람이지요. 청소년기에는 일제 식민지 치하에서 보냈고, 해방 후에는 좌우익의 혼란을 겪고 그리고 6.25 때는 종군기자의 역할을 하고, 기어코 31세의 짧은 나이에 요절하고 맙니다. 박 시인 묘비에는 '세월이 가면'이란 시의 1연이 새겨져 있어 더욱 슬픔을 느끼게 하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