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6년 9월30일 평택에 사는 후배는 고조부 산소쪽으로 길이 생긴다는 이유로 피치 못하게
파묘를 하여 화장(火葬)을 하기로 되어 있었으며 .미리 감정을 한 수맥을 피해 계신 증조부의
산소와 조모님의 묘까지 덩달아 파묘를 하여 화장을 하기로 일정 계휙이 되어 있었다.
그도 그럴것이 후배의 위로 작은 아버지가 계셨는데 그분이 주관하여 화장을 할 수 밖에 없었던
상황임을 본 연구위원님들도 그날의 일을 기억하시리라 본다.
필자와 연구위원들이 현장에 도착하였을때는 이미 증조부와 조모의 묘를 모두 파묘한 상태였으며
근 100년이 된 고조부의 산소를 모두 파묘하여 비닐봉지에 담아서 철수 하는 상황이였다.
현장에서 화장을 하기위해 준비한 석쇠와 번개탄 그리고 가스토치를 들고 자신의 선산으로 발길을
돌린 현장에서 3분의 유골을 풀어헤친 유골의 상태는 70~100년이 다 되어 있었지만 화장으로 모든
것을 종결짓기에는 너무도 아쉬웠다.
그날 일제히 연구위원님들은 작은아버지라는 분을 설득하여 후배가 책임지는 것으로 역임하고 화장을
매장으로 손쉽게 바꾸게 되었던 이날 수맥을 피한 양지바른 땅에 봉분없이 3분의 유골을 모실 수 있었다.
좌측으로는 후배의 부친의 묘가 있었고 우측으로 3분의 체백을 모시게 된것이다.
이일이 있었던지 1년이 다되어가던 2007년 9월19일 필자가 벌초를 하기위해
선산에서 일을 하고 있는데 후배로 부터 전화 한 통이 걸려왔다.
후배왈! 형 내가 37평대의 집한채가 생기고 1년전에 모신 아버지 산소와 고조분 산소뒤로 공장이 들어
서게 되었는데 공장주인이 산을 가로질러서 가야하기 때문에 길을 내야 하는데 보상은 높게 쳐줄테니
길좀 내달라고 사정사정을 하더라는것.
은행에서 대출을 얻어서 매달 100만원씩 이자가 나가는 와중에서 뜻하지 않게 산으로 길이 나면서
평당 100만원씩 쳐주겠다는 공장업주의 제안을 받게 되었다는 것이다.
1년전과 크게 변한것이 없고 이장후 지금까지 별탈이 없었으며 개발의 기미라고는 보이지 않던 그곳에
공장이 들어서게 되었다는 후배는 곰곰히 생각해 보니 1년전에 필자가 했던 말과 그날 오셨던 분들의
말이 떠오르더라는 것이였다.
이렇게 이장후 큰 우환없이 좋은일만이 생기는 것이 봉분없이 모시긴 했지만 3분의 음덕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떠오른다는 후배
후배는 내년에는 선산에 계신 또 다른 4분의 봉분까지 사초를 하고 평장으로 모신
그분들의 터 까지 모두 새롭게 사초를 하기로 했다.
조상님으로 부터 받은 음덕이니 그분들을 위해 사용해야 함을 일러주며 통화를 맺었다.
모르는 분들의 묘를 돌보아 주는 것도 참으로 부담이 되는 일이지만 안면이 깊은 사람의 묘지를 돌보는
일은 두고두고 마음에 걸리는 경우가 많다.
좋은일들로 가득하기를 바라며 행하는 그날의 마음이 그분들에게 감응이 되어 오늘의 길조가 생기기
않았나 여기며 그날의 소식을 적어 보았다.
* 이날 자리를 함께 했던 연구위원님과 현장 참가자 2분
宣人 배성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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